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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선왕조의 적통 계승을 통해 본 음택 풍수

[기고] 조선왕조의 적통 계승을 통해 본 음택 풍수

기사승인 2021. 04. 1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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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세종은 자신의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당대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에게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물길이 새의 입처럼 갈라졌다는 이유로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絶嗣損長子)’고 하는 험악한 주장을 한 것이다. 범인(凡人)이 아닌 살아있는 왕의 능지에 혹평의 정도를 넘어 악평을 늘어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점이다. 그 전에 문종의 세자비(단종의 모친) 능지를 안산에 정하는 과정에서도 풍수가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농시의 종 목효지는 <동림조담(洞林照膽)>이라는 풍수서를 인용해서 ‘내룡이 악(惡)하고 약(弱)하면 낳는 아이(兒)가 녹아 버린다’고 하는 살벌한 상소문을 올린다.

전농시의 종이었던 목효지가 어떻게 풍수서를 접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는지 알 수 없으나, 문제는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사실이다. 문종의 요절과 단종의 죽음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예언하고 있으나, 이 주장은 대신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만다.

이와 같이 조선 초의 왕릉 조성과정에는 다양한 주장이 여과 없이 제시되었고,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면서 보다 좋은 길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차츰 왕릉조성과정에 정치적인 이유들이 크게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풍수학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대신들은 자신들의 선산이 왕릉에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선정되지 않도록 편법을 쓰는 일도 다반사였다. 길지선정에 어려움이 컸던 만큼, 조선왕조의 왕위계승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우선적으로 왕조의 적통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쿠데타를 통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부터 살펴보자.

세종대왕 능
세종대왕의 능은 원래 내곡동에 있었으나 ‘풍수가 좋지 않다’하여 여주로 이장하였다.
세조는 온몸에 난 종기로 인해 고생을 하다 죽게 되는데, 단종이 죽던 그 해에 적장자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
이라는 적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는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에게로 돌아갔다. 다시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이 아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에게 돌아가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세조의 적손인 월산대군의 후손을 살펴보면, 월산대군은 34년을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그리 일찍 죽은 것이 아니다. 장남인 덕풍군은 22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덕풍군의 장자인 파림군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차남인 계림군이 성종의 서자인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을사사화 당시 역모의 모함을 받음으로써 덕풍군의 가계(家系)는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세종의 적통이 손자인 단종에서 단절되었듯이, 세조의 적손 역시 그의 고손자인 파림군에서 끝나고 말았다.

성종으로 왕위가 이어지면서 가계는 평탄하였을까? 아니다. 성종의 장남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연산군의 왕위를 이은 중종의 적장자인 인종마저 30살에 왕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만에 요절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순회세자를 13살에 잃
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는 명종의 서형제인 덕흥군의 3남 하성군 균이었다. 방계도 아닌 서자의 자손으로 그것도 3남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명종의 고명조차 받지 못했던 선조는 이후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 역시 성품에 문제가 있었고, 적장자인 영창대군은 너무 늦게 태어난 탓에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나마 왕위를 이은 광해군은 아우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에 의해 내쫓기게 된다. 광해군의 장자는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탈출에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한다. 인조의 장남은 소현세자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으로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그해 34살의 나이로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석철과 석린은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다시 한번 인조의 장손이 끊어지고 만다.

성종의 선릉
성종의 선릉.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파헤쳐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다.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비교적 평탄했다고 볼 수 있다. 현종은 효종의 적장자이고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이다. 비로소 조선이 건국하고 세종-문종-단종에 이어 두 번째로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진 적통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려 110년 6대에 걸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종의 경우는 적자인가 서자인가가 조금 애매하다. 그의 생모인 장희빈이 한때 왕비로 책봉된 적이 있었고 공식적으로 경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다. 경종 역시 즉위 4년 만에 후손도 없이 요절하고 만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무수리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 영조이다. 영조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장자 없이 후궁에게서 효장세자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얻었으나, 모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하고 만다. 장헌세자의 적장자가 정조인데 정조 또한 적장자를 두지 못하고 후궁에게서 태어난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순조 역시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고 헌종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헌종 역시 후손이 없이 죽고 만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손인 강화도령 철종이다.

고종은 더 복잡하다. 그의 선조는 인조의 4남인 인평대군이다. 인평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비로소 왕족이 되었다. 남연군의 4남인 흥선군의 차남이 바로 개똥이 고종이다. 고종 역시 명성황후 민씨에게서 태어난 장남은 어려서 죽고 차남인 순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역시 후손 없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만다.

다사다난했던 조선왕조에서 장자 계승의 원칙이 지켜진 것은 문종과 단종, 인종, 현종, 숙종뿐이었고 서장자라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예조차 경종 한 번뿐이다. 장손이 왕위를 이은 경우도 정조와 헌종 단 두 번뿐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왕들은 명당길지에 자신의 능지를 조성하고자 하였으나, 제대로 된 적통계승 또한 이루지 못하는 불운이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을 음택풍수의 영역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으나, 다시금 생각할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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