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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텔 미! 텔 미 썸딩!

[칼럼]텔 미! 텔 미 썸딩!

기사승인 2021. 05. 2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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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영화 ‘텔 미 썸딩’은 범죄 영화다. 그것도 연쇄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게다가 신체 훼손의 코드는 고어 영화로 범주화될만하다. 이 작품은 근친에 의한 성적 학대, 동성애 코드 등 1999년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파격으로 다가왔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당대 평단에서는 혹평이 뒤따랐다. 사실 연출을 맡은 장윤현 감독의 전작 영화 ‘접속’(1997년 작)의 세련된 아련함을 기대한 관객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할 만했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의 일방적인 혹독한 비평은 현재 관점에서 보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극단적인 가부장제에서 학대받은 여성의 복수극으로 페미니즘적 코드로 읽힐 만한 요소가 있다. 연쇄살인마가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고 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남성이다. 그것도 전문직 남성들이다. 바로 이 점에서 기존의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영화의 전형을 벗어나 있다. 여성 혹은 어린이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한 장르적 관습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그런 해석 역시 가능해 보인다. 사실 ‘텔 미 썸딩’은 저평가된 영화다. 아니 살짝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과 평단에서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텔 미 썸딩은 ‘사적 구제’에 대한 영화이다.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어린 주인공은 커서 부친살해를 도모한다. 최초의 살인은 학대의 주체를 응징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대신할 새로운 상으로서 남성성의 이미지를 재창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감미로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팔, 따뜻하지만 강인한 심장, 진취적인 삶을 견인할 다리 그리고 공감의 정서를 소유한 형사의 머리로 세상에 부재한 남자를 만들고자 한다. 사적 구제는 그 명분을 넘어서 확장되고 급기야 아버지란 이름의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한다.

그런 맥락에서 ‘텔 미 썸딩’의 프롤로그는 매우 인상적인데, 한 남성이 허름한 아파트로 찾아와 팔이 잘린다. 이때 헤라르트 다비드의 회화 ‘캄비세스 왕의 심판’이란 그림이 교차돼 보여 진다. 그림에서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뇌물을 받아 공정한 재판을 훼손한 판관 시삼네스에게 살아있는 채로 피부를 벗기는 형벌을 가한다. 그의 아들을 후임 재판관으로 앉히고 직접 아버지의 형벌을 집행하게 만들어 만인에게 부패한 관료가 어떻게 처단되는지 본보기를 보인다. 영화에서 이 그림이 프롤로그에 삽입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극 중 주인공은 사회악과 대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악이 된다. 말하자면 법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사회저반에 꿈틀대는 사적 구제의 어두운 기운은 우리 생활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어쨌든 영화 ‘텔 미 썸딩’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기에 더욱더 흥미로운 텍스트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명백한 논리로 해석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석한 이들의 의중이 반영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방법적 회의로 얻어낸 결론은 해석과 판단에 왜곡이 개입될 여지가 늘 있다는 것이다.

매체에서 어떤 사건을 다루고 해석하는 데에는, 짐짓 그 메타 메시지를 통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모략이 숨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텔 미! 텔 미 썸딩! 그러나 결코 그들은 그 속내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는 시민’들이 더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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