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여행] 신선 놀던 강변에서 늦여름 산책

[여행] 신선 놀던 강변에서 늦여름 산책

기사승인 2021. 08. 17. 09:5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강원 영월 무릉도원면 여행
여행/ 요선암
요선암은 ‘신선을 맞는 바위’라는 의미를 가졌다. 화강암 반석의 틈을 파고든 자갈과 모래가 물살에 소용돌이치며 돌개구멍을 만들었다./ 김성환 기자
여행은 호기심이다. 동네 이름 하나가 마음을 끌기도 한다. 강원도 영월에 무릉도원면(面)이 있다. 원래는 수주면이었다. 주민들의 청원으로 2016년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면 내에 무릉리(里)와 도원리가 인접해 있는 것이 계기가 됐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도화원기’에 그린 이상향만큼은 아니어도 주천강을 따라가면 꽉 막힌 일상에 위안이 되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여행/ 주천강
무릉리 일대 주천강 풍경.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한갓진 강변의 정취를 즐기며 소소한 추억을 만든다./ 김성환 기자
‘무릉도원’에 발을 들이면 주천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월에는 강이 많다. 잘 알려진 동강과 서강이 있고 평창강, 주천강도 흐른다. 주천강은 강원도 평창과 횡성의 경계에 솟은 태기산(1261m)에서 발원해 영월로 흘러든다. 무릉도원면, 주천면을 지난 후 한반도면에서 평창강을 만나 서강이 된다. 서강은 다시 동강과 합류해 남한강이 된다. 이러니 남한강의 첫 물줄기가 주천강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영월에는 한반도면, 김삿갓면도 있다. 한반도면 선암마을에는 한반도지형이 있고 김삿갓면에는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병연의 흔적이 오롯하다.

주천강은 동강이나 서강의 명성에 살짝 가려져 있지만 수려함은 이에 못지않다. 골짜기와 여울을 지나며 부산스럽지 않고 급할 것 없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갓진 강변의 정취에 젖어 소소한 추억을 만들고 간다. 물살이 순해지는 곳을 택해 물놀이를 하고 천렵도 즐긴다.

여행/ 요선암
곡선 형태의 화강암 반석이 눈길을 끄는 요선암/ 김성환 기자
여행/ 요선암
요선암 돌개구멍/ 김성환 기자
눈이 놀랄 풍경을 보며 세속의 시름을 잠깐 잊기도 한다. 요선암(邀仙岩) 얘기다. 무릉리 주천강변의 화강암 반석들이 요선암이다. 강가의 너럭바위가 뭐 그리 대수일까. 가서 보면 별천지다. 바위들은 저마다 물살에 깎여 부드러운 곡선형태로 다듬어졌다.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진흙으로 빚어 놓은 듯 보인다. 가운데가 항아리처럼 둥글게 파인 것도 있다. 기묘한 형태의 바위가 강바닥을 덮으니 풍경 역시 기묘하다.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봉래 양사언(1517~1584)에게는 이게 선계(仙界)의 풍경 같았나보다. 평창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들른 그는 ‘신선을 맞는 바위’라는 의미로 요선암이라 이름을 붙이고 어느 반석에 글씨도 새겼다. 이후부터 이 일대가 요선암으로 불렸단다. 세월이 흘러 글씨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의 애를 태운 풍경은 여전히 남았다.

여행/ 요선정
‘신선을 맞이하는 정자’ 요선정. 왼쪽 둥그런 바위에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김성환 기자
여행/ 요선정
요선정에 걸린 숙종 어제시 현판/ 김성환 기자
요선암은 영겁의 시간이 빚은 작품이다. 바위는 중생대 쥐라기의 화강암이란다. 오랜 시간 물살이 바위를 조각했다. 움푹 패인 곳은 ‘돌개구멍’이라고 불린다. 바위 틈이나 오목한 곳을 비집고 들어간 자갈이나 모래가 물살에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깎았다. 물살이 빠를수록, 물의 양의 많을수록 소용돌이는 더 크게 일고 돌개구멍도 점점 넒어진다. 크기는 다양하다. 지름이 1m에 달하는 것도 있고 깊이가 2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만히 보면 강변은 거대한 야외 전시장, 둥글둥글한 반석은 돌을 깎아 만든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돌개구멍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고 신선들이 탁족을 하며 담소를 나눴다는 전설도 더해졌다. 신선의 옷자락처럼 매끄러운 바위가 볕을 받아 반짝거리면 눈이 호강한다. 바람 선선해지면 머리 식히며 한나절 놀다가기에도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바위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김성환 기자
요선암 뒤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요선정(邀僊亭)이 있다. 역시 ‘신선을 맞이하는 정자’다. 이름값을 한다. 정자 뒤에 펼쳐지는 장쾌한 풍경에 숨통이 트인다. 주천강이 준봉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흐른다. 암벽에 억척스럽게 뿌리 내린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요선정은 단출하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다. 아주 오래된 건물도 아니다. 무릉리의 요선계원들이 1915년 세웠단다. 정자보다 오히려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어제시 현판이 더 유명하다. 현판은 원래 주천강 북쪽 언덕의 ‘청허루’라는 정자에 봉안됐다. 세월이 흐르며 청허루가 붕괴되고 일제강점기에 현판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거부감을 느낀 요선계원들이 끝내 다시 매입했다. 요선정을 짓고 이 안에 다시 봉안했다.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성을 살필 수 있는 산물이라 의미가 크다.

여행/ 요선정
요선정 뒤에서 본 풍경. 발 아래로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바위에 뿌리 내린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김성환 기자
여행/ 요선정
요선암에서 요선정으로 가는 길은 산책코스로 적당하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김성환 기자
요선정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요선정 앞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이다. 물방울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한쪽 면에 새긴 3.5m 높이의 석불이다. 학계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불이 또 기묘하다. 볼록 튀어나온 면에 새겨진 데다 머리와 어깨의 새김이 두텁고 상체의 길이가 길어서 옆에서 보면 마치 머리부터 바위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신경림 시인은 바위에서 나온 마애불이 주천강도 가고 장터도 돌아다니며 사바세계의 중생의 삶을 지켜본다고 했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성큼성큼 주천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있다...’(신경림 ‘주천강가의 마애불’)

요선암에서 요선정까지는 산책 삼아 걷기에 좋다. 조붓한 숲길이 10여 분 이어진다. 경사가 조금 있지만 힘이 부칠 정도는 아니다.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알싸한 소나무 향이 좋다.

여행/ 법흥사
법흥사 적멸보궁/ 김성환 기자
‘무릉도원’ 여정에 법흥사를 포함해도 좋다. 사자산(1181m) 기슭에 있는데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잘 알려졌다. 신라 자장율사가 643년에 흥녕사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맥을 이어오다가 1902년 법흥사로 개칭돼 재건됐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고 돌아와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그리고 법흥사에 각각 봉안했다고 전한다. 만다라전 뒤로 난 숲길을 20여 분 걸어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이곳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딘가에 부처의 사리가 묻혀 있단다. 절도 절이지만 경내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운치가 있다. 10km에 이르는 법흥계곡도 좋다.

볕이 순해지면 무릉도원면을 돌아볼만하다. 천연한 주천강변 산책이 머리를 맑게 하고 신선과 선녀의 얘기, 바위에 새겨진 석불의 전설이 귀를 즐겁게 만든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