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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바다 위 은빛 군무, 깊어 가는 제주의 가을

[여행] 바다 위 은빛 군무, 깊어 가는 제주의 가을

기사승인 2021. 11. 0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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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마보기 오름 억새 탐방
여행/ 차귀도
차귀도는 지금 억새 천지다. 바람이 불면 ‘은빛융단’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김성환 기자
제주의 가을은 은빛이다. 눈 돌리는 곳마다 물오른 억새가 바람 타고 춤을 춘다. 단풍무리처럼 현란하지 않지만 여운이 참 오래간다. 이런 풍경 하나쯤 가슴에 품을 만하다. 두고두고 게워내 곱씹으면 퍽퍽한 일상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차귀도는 지금 섬 전체에 은빛융단이 깔렸다. 마보기(마복이) 오름에선 어른 키만한 억새를 볼 수 있다.

여행/ 차귀도
차귀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김성환 기자
차귀도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서 2km 거리에 있다. 여기서 유람선을 타면 10분이 채 안 걸려 닿는다. 사람은 살지 않는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422호)이다. 제주에 딸린 무인도 중에서 가장 크다. 안내판에 따르면 “1970년대 말까지 7가구가 보리, 콩, 수박, 참외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정부 정책에 따라 주민들이 모두 떠난 후 30여 년간 인적이 없었다. 2011년에야 비로소 사람의 왕래가 재개됐다.

여행/ 차귀도
차귀도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21 가을시즌 비대면 안심관광지이자 제주관광공사가 선정한 비대면 여행지다./ 김성환 기자
차귀도 선착장에서 5분쯤 가파른 해안절벽을 오르면 건물터가 나온다. 지붕이 떨어져 나가고 외벽만 덩그렇게 남았다. 적적함이 느껴지지만 딱 여기까지다. 다음부터 시야가 트이면서 눈이 호강한다. 크고 작은 언덕이 파도처럼 포개지는 지형이 예쁘다. 이유가 있다. 차귀도는 2개의 큰 화산체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겹쳐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화산이다. 이게 풍화와 침식작용에 깎여나가며 독특한 모양이 됐다.

구릉은 억새 천지다. 차귀도는 대나무가 많아서 죽도로도 불렸다. 섬 한편에 조릿대 군락지가 있지만 주인공은 억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볕 받아 반짝이는 억새다. 바다를 배경으로 섬을 덮은 은빛융단이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이 운치가 있다. 잠깐만 훑어도 숨통이 트인다. 섬 구경도 편하다. 차귀도가 0.16㎡로 크지 않은 데다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서다. 1~2시간이면 섬을 에두를 수 있다. 그런데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많다. 일일이 좇다보면 짧은 여정이 긴 여행이 된다.

여행/ 차귀도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면 붉은색 화산송이 절벽과 장군바위, 병풍바위, 매바위가 보인다. 멀리 수월봉도 눈에 들어온다./ 김성환 기자
여행/ 매바위
차귀도에 딸린 매바위. 낚시 포인트로도 잘 알려졌다./ 김성환 기자
제주도는 섬 전체가 국가지질공원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화산활동이 독특한 지형을 만들었다. 차귀도에서도 화산활동이 여러 차례 간격을 두고 발생했단다. 이 흔적들이 섬 곳곳에 오롯하다. 차귀도를 비롯해 일대의 매바위, 쌍둥이 바위, 장군바위 등이 모두 이에 따른 부산물이다. 동쪽 해안 탐방로에선 화산송이로 뒤덮인 해안절벽이 나온다. 검은 해변과 붉은 절벽의 대조가 눈길을 끈다. 송이는 화산 쇄설물인데 붉은색을 띠는 것은 현무암이 산화했기 때문이다. 이 앞의 장군바위는 촛대처럼 생겼다. 마그마가 분출되지 않고 굳은 것인데 이 주변에 분화구가 있었단다. 매바위 너머로 수월봉도 보인다. 작은 오름인데 차귀도와 함께 대표적인 지질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해안절벽을 따라 드러난 화산재 지층 속에 다양한 화산 퇴적구조물이 남겨져 ‘화산학의 교과서’라고 불린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자살특공용 보트와 탄약을 보관하던 갱도 등이 남아있다. 차귀도와 연계해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행/ 볼래기등대
볼래기 등대. 주민들이 돌과 자재를 날라 만들었다. 볼래기는 제주 방언으로 ‘헐떡거리다’라는 의미다./ 김성환 기자
차귀도가 걸친 여러 전설은 귀를 즐겁게 만든다. 옛날 중국 송나라 사람 호종단(胡宗旦)이 이 섬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으려고 했다. 이때 날쌘 매가 돛대 위에 앉았는데 별안간 돌풍이 일더니 끝내 배가 침몰했다. 돛대 위에 앉았던 매는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었단다. ‘끝내 돌아가지 못한 섬’이라는 의미의 차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문대 할망의 전설은 장군바위에도 깃들었다. 장군바위가 500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고 나머지 499명은 한라산 영실에 있는 영실기암이라는 내용이다.

예쁜 등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샷’ 단골 배경이다. 차귀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 ‘볼래기 동산’이고 여기에 ‘볼래기 등대’가 있다. 등대는 고산리 주민들이 직접 만든 무인등대다. 볼래기는 제주말로 ‘헐떡거리다’는 의미다. 주민들이 등대를 만들 때 돌과 자재를 직접 들고 언덕을 오르면 숨을 ‘볼락볼락’ 가쁘게 쉬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차귀도는 ‘까치’와 ‘엄지’가 나오는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1986)에서 지옥훈련 장소로 나온다. 직접 가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억새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고 볼래기 등대 앞에서 바다를 보며 먹먹함을 풀고 간다. 차귀도는 한국관광공사와 제주관광공사가 선정한 비대면 안심관광지다.

여행/ 마보기 오름
마보기 오름에선 어른 키만한 억새를 볼 수 있다./ 김성환 기자
마보기 오름은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에 있다. 포도호텔 앞이 입구다. 조붓한 삼나무숲길을 지나 20분쯤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한라산을 비롯해 산방산, 가파도 등 제주 서쪽 풍경이 오롯이 눈에 들어온다. 높지 않지만 제주의 가을 서정을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천연 전망대다. 제주는 오름의 땅이다. 다 합치면 370여 개나 된다. 이름난 오름 대부분은 동쪽에 많다. 서쪽의 마보기 오름은 이에 비하면 눈길을 덜 받는 오름이다. 그런데 가을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전망도 전망이지만 사람 키만한 억새가 지천이다.

여행/ 행기소
행기소/ 김성환 기자
특히 마보기 오름에서 서영아리오름 중턱의 ‘행기소’까지 가는 구간이 백미다. 약 30분쯤 걸린다. 산책로가 있지만 무성하게 자란 억새 탓에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그만큼 인적이 드물다는 얘기다. 아주 못 갈 정도는 아니다. 억새를 헤치는 수고를 조금만 하면 된다. 가을은 사색하며 마음을 살피기에 제격인 계절이지만 이 구간에선 마음 여미고 말 것도 없다. 억새에 안기면 시나브로 ‘힐링’이 된다. 행기소는 ‘물이 담긴 그릇’이란 뜻이다. 원형의 습지인데 예전에는 주민들이 소를 끌고와 물을 먹이기도 했단다. 물이 차 있는 날에는 원시의 숲에 꼭꼭 숨겨진 신비한 호수처럼 보인다. 갈수기에는 운치가 덜 하지만 한갓진 쉼터로서 손색이 없다. 주변으로 삼나무, 서어나무가 울창하고 새소리, 바람소리가 참 선명하다. 제주도는 바다가 예쁘다. 바다보다 깊은 숲도 좋다. 이 계절엔 들녘의 억새도 바다와 숲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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