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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과잉된 미장센

[칼럼]과잉된 미장센

기사승인 2022. 01. 1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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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어떤 영화가 있다고 하자. 장르물인 경찰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가정하자. 이 영화의 등장인물로, 절대 악인 마약밀매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악마시하는 캐릭터의 형사가 있다. 이를 지켜보는 동료는 항상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기꺼이 그의 조력자가 된다. 전자의 캐릭터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혹시 진짜 악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반면 후자의 캐릭터는 변하지만 그렇다고 삶의 기준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악을 물리치고자 하는 초심엔 변화가 없다. 마침내 둘은 서로의 진정성을 알게 되고 한배를 타게 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언어로 구성된 소설과는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소설의 문체도 영화적 이미지와 사운드를 빌어 신(scene)이 되었을 때 그 결과물은 밋밋하기 일쑤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장면이 구축되었다면 적어도 두, 세 번은 그와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된다. 기왕에 형사가 등장하는 장르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악을 소탕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고참 형사가 있다고 하자. 그는 적인지 동료인지 분간이 어렵다. 쉽게 경계를 오간다. 보는 이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점차 그의 본심을 알아가게 되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때 관객과의 ‘밀당’을 위한 장치로 영화에서 특정 소품이나 공간이 미장센으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운전대 옆에 방향제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방향제 안은 파란색 물과 무색의 기름으로 채워져 있다. 그 경계 위에 작은 배가 띄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투명한 방향제 용기 안의 용액은 마치 파도가 출렁거리듯 일렁이고 그 위의 작은 배는 요동친다. 하지만 기름과 물은 섞길 일이 만무하고, 그 경계 위에서 위태로워 보이던 배는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이와 같은 소품이 영화의 서사에 잘 녹아 배치되면 이제 관객은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된다. 다소 작위적인 모습의 악마성으로 무장한 주인공이 알고 보면 진정한 형사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악을 소탕하고 사회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경계를 오가며 범죄조직보다도 더 위악적으로 보인 이유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쯤 되면 비교적 잘된 미장센이랄 수 있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경계인을 자청하며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헌신적인 형사,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사유가 있기 마련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그 사연은 당사자가 아닌 동료에 의해 밝혀진다. 그 때문에 형사물 장르는 대개 버디 영화(buddy films)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이들 두 주인공이 반목과 의심을 씻고 마침내 하나의 가치, 즉 변치 않는 초심에서 만나 의기투합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복선이 장면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바둑돌을 놓아둔 배의 이미지를 다시 활용해야 좋을 듯싶다. 그들이 진심을 터고 의를 합치는 공간으로 배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다.

한배에 올라, 먼바다 위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그들은 진심이 통한다. 물론 이런 설정 역시 적어도 한두 번은 더 위기를 맞이하겠지만 결국 이들은 초심에서 다시 만나 그들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언어적 관습을 이미지화하는 영상 스토리텔링의 전형이다. ‘한배를 탔다’라는 관용구가 영화의 신(scene)이 되고 이 신이 궁극에는 결말의 복선이 되었을 때 그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정석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러티브의 치밀함과 엔딩까지 밀어붙이는 솜씨는 별개의 문제이다. 소위 미장센이 잘되었다고 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걸작이나 수작은 아니더라도, 관객과 소통하며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데는 충분하다. 적절하게 ‘과잉되지 않는 미장센’을 구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상영 중인 어떤 영화에 관한 이야기다.

한편, 이러한 미장센 놀이는 극우적인 주장을 일삼는 커뮤니티에서 곧잘 사용되는 놀이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만 알아채는 제스처나 이미지로 된 사인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길 일삼는다. 서로에겐 확실한 신호로 읽히겠지만 상식이 있는 시민들에게는 통할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미장센은 과잉되다 못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책임이 있는 이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말과 함께 익살로 보아달라고 하면 이보다 더 폭력적인 요설은 없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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