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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단골손님 ‘후보 단일화’... 역대 성적표 살펴보니

대선 단골손님 ‘후보 단일화’... 역대 성적표 살펴보니

기사승인 2022. 01. 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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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 尹·安 단일화 여부 관심
15대 DJP연합·16대 노무현-정몽준 결합 성공
13대 YS-DJ·17대 정동영-문국현 실패
윤 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25일 오후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양강 구도의 박빙 승부로 흘러가면서 막판 ‘후보 단일화’ 변수가 주목받고 있다. 이재명 대선 후보와 윤석열 대선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접전을 벌이는 사이 안철수 대선 후보가 1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여야 후보 누구든 안 후보와 손을 잡는다면 그만큼 여유로운 승리가 가능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27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 따르면 과거 대선에서도 단일화·후보사퇴 등이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 1987년 이후 19대 대선까지 일곱 번의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판세가 기운 2007년 대선을 제외하곤 후보 단일화 이슈가 ‘단골 손님’으로 떠올랐다.

◇역대 후보 단일화 승패의 교훈

첫 시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두 출마한 1987년 13대 대선이었다. 군사독재를 마감하고 민주정권 탄생을 바라는 국민들로부터 ‘단일화’ 요구가 빗발쳤지만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해 따로따로 출마하게 됐다. 그 결과 김영삼 전 대통령(28.0%)과 김대중 전 대통령(27.0%)이 노태우 전 대통령(36.6%)에게 승리를 헌납했단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후 1992년 14대 대선에선 ‘민주정의당(노태우)·통일민주당(김영삼)·신민주공화당(김종필)’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빛을 봤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의 총재가 됐고 대선에 나가 대통령이 됐다.

1997년 15대 대선에선 후보 단일화가 결실을 이뤘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연합 소속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일명 ‘DJP 연합’을 이뤘다. 이를 기반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고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단일화가 화두였다. 새천년민주당 후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월드컵 성공 개최를 계기로 주가를 끌어올린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선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다. 단일 후보로 선출된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전날 밤 정 후보의 지지 철회로 위기를 맞았으나 결과적으론 이회창 한나라당 당시 대선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7년 17대 대선에선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선 후보, 이인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단일화 논의를 주고받았지만, 이명박 대선 후보와의 격차가 커 성사되지 않았다.

2012년 18대 대선에선 야권이 후보 단일화를 이뤘음에도 패전을 면치 못했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인 문재인 대통령이 안철수 당시 무소속 후보와 단일화 논의를 진행했지만 의견차로 갈등을 반복했다. 그러다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하는 형식으로 단일화에 성공했다. 다만 후보 간 합의로 단일화를 이룬 게 아닌 만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게 승리를 넘겨주게 됐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도 후보 단일화 논의가 이슈로 떠올랐다. 선두주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맞서기 위해 홍준표 자유한국당·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에 대한 국민적 단일화 요구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당시 홍 후보(24.03%)와 안 후보(21.41%)의 대선 득표율을 합하면 45.44%로, 문 대통령의 득표율(41.08%)을 상회하는 수치였다.

결과적으로는 2000년대 이후 대선에서 선거 막바지 후보 단일화가 이슈가 됐던 경우는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단일화로 집권한 2002년과 그렇지 않았던 2012년이 대표적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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