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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정의 씨어터토크]일상 파고드는 파시즘에 대한 성찰, 뮤지컬 ‘쇼맨’

[현수정의 씨어터토크]일상 파고드는 파시즘에 대한 성찰, 뮤지컬 ‘쇼맨’

기사승인 2022. 05. 2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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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쇼맨_공연사진 (1)
뮤지컬 ‘쇼맨’의 한 장면./제공=국립정동극장
뮤지컬 ‘쇼맨-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한정석 작/이선영 작곡/박소영 연출)의 무대는 단출하다. 화려한 장치를 통해 환영을 만들어내는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창고형 스튜디오’ 콘셉트의 무대는 연극적 약속에 따라 그때그때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하고, 도구들도 그러하다.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들기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보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러한 무대 위에서 한 노인이 자신의 삶을 재연해 보이고는 “나를 판단해 줘요”라고 부탁한다. 그는 독재자의 대역 배우로서 부역했던 인물이다. 상대 배우를 향한 그 부탁은 관객 모두를 향해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딱 떨어지는 답을 제공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신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대역’이라는 것은 정체성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네불라의 특수한 상황을 관객의 보편적인 문제와 연결해 주는 인물은 사진작가(인 척하는) 수아이다. 그녀는 자신을 전문작가로 착각해 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라는 네불라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사진작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 ‘대역’이라는 것은 수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상처이며 고민이다. 고아인 수아는 어릴 때 미국의 가정에 입양됐는데, 알고 보니 양부모님 외출 시 그들을 대신하여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는 자리였다. ‘굿 걸’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던 그녀는 지금은 ‘굿 데이’라는 마트에서 병가를 낸 매니저를 대신하여 일하는 중이다.

네불라와 수아는 권위 있는 목소리와 사회적인 욕망을 내면화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무지한 상태이기도 하다. 수아 역시 잠시나마 마트의 일원을 잔인하게 희생시키며 매니저 자리를 꿰차는 상상에 빠진 것처럼. 한편,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내용에만 그쳤다면 새롭게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과 존재 조건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로 주제를 확장하는 지점이다. 배우들은 모두 함께 “인생은 내 키만큼의 깊은 바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 몰라”라고 노래하며 공허하게 제자리 뛰기를 한다. 그런데 ‘스스로’ 헤엄을 치지 못해도 의미를 찾기 위해 뛰어오르는 그 찰나의 모습들이 바로 ‘나’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극의 말미에 사진들을 현상해 보이며 다양한 모습들이 모두 네불라임을 강조하는 수아의 대사도 이와 연관된다.

나아가, 이 작품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네불라는 정권이 몰락하고 재판을 통해 죄값을 치른 후 독재자를 희화화하는 연기로 스스로를 조롱해 왔다. 그렇다고 독재자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조명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판단해 달라 부탁하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견디는 모습 자체이다. 수아가 보여주는 것 또한 일그러진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듯 힘겹게 네불라와의 사진 작업을 진행하며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모습이다. 이후 그녀는 양부모님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동생에게 연락하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국립정동극장] 쇼맨_공연사진 (5)
뮤지컬 ‘쇼맨’의 한 장면./제공=국립정동극장
음악 역시 선율을 감성적으로 살리기보다 인물들의 상황과 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선율은 수아의 생각을, 숨은 듯 드러나는 트럼펫은 네불라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상기시키듯 바이올린과 첼로의 풍성한 사운드가 강조된다. 특히 음악이 점점 커지면서 끝나는 방식은 마음속 반복충동 혹은 각성을 연상케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학적으로 꾸며진 독재자의 이미지가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표현된다는 점인데, 오히려 아름다운 멜로디로 마음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일상을 파고드는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주목할 것은 극의 시작인 ‘인트로’에서 트럼펫으로 연주된 짧은 선율은 네불라와 수아의 노래 등 계속 변주되며 극이 마무리될 때까지 통일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에 음의 화성을 단조키에서 장조키로 변환시키며 마무리한다는 점은 우리의 삶에 대해 희망과 위로의 전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국립정동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주제, 무대, 음악, 그리고 연기의 콘셉트가 유기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레퍼토리화를 기대하게 만든다. 네불라 역의 윤나무는 현재의 노인인 동시에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등을 재연하는 연기를 집중력 있게 보여주었고, 수아 역의 박란주는 네불라를 옆에서 바라보는 동시에 내적 변화를 겪는 모습을 절제력 있게 소화했다. 7월 8일~10일, 대구뮤지컬페스티벌에서 재공연할 예정이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현수정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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