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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21세기에 돌아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강성학 칼럼] 21세기에 돌아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기사승인 2023. 01. 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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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17세기 당시 지배적인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King)을 거부하고 주권재민의 시민정부론을 제시한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의 정치사상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의해 집약되었고 미국의 국부들에 의해 미합중국의 건국에서 구현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본주의의 아버지'였다. 그에게 인간의 생존은 곧 재산(property)의 보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크가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성격의 사회일까? 그것은 개인주의적 사회라고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법(the Law of Nature)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일종의 신성한 영역을 이룬다.

로크는 진실로 자본주의의 아버지였지만 그렇다고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기여를 우리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는 경제적 자유를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들이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둘 때 부산물로서 공공선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처럼 자신들의 원래 의도가 아닌 목적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로크와 스미스에게 개인적 재산의 축적은 곧 자연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 재산축적의 자유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다. 그리하여 로크와 스미스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잔 자크 루소(J. J. Rosseau)에 의해서 강력히 도전을 받게 된다. 루소는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재산에서 찾았다. 루소가 상정하는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에서 인간들은 선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인간이 시민사회의 생활을 통해서 이기적이고 저돌적이며 경쟁적이고 시기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다.

루소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낮은 차원의 열정만을 갖고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것들이다. 그들은 단순할 뿐 지성이 없다. 단순함은 선이요 미덕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에 들어와서 인간은 변해버렸다. 그에게 인간의 본성(the human nature)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매우 급속하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인간성은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또 실제로 결정되었다. 루소가 볼 때 자연상태에서 시민사회로의 이전은 축복이 아니라 마치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것처럼 타락이다. 그리하여 시민사회에 대해 보다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근본적인 도전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에서 국가의 소멸, 즉 시민사회의 소멸로 끝나게 된다.

마르크스에게는 자연상태와 시민사회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그에게 자연상태 같은 것은 없다. 헤겔(Hegel)을 따른 마르크스에겐 자연이라는 그 자체가 역사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미 루소에게 인간본성은 역사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와서는 모든 자연이 역사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화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이 되는 과정(becoming)에 있으며 이것이 존재의 참된 토대가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의 구분, 즉 역사의 시대적 구분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따른 노동분업이 가장 큰 문제였다. 증가하는 인구의 압력하에서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해 생산할 필요가 있게 되자 인간들은 생산도구를 사용하여 재산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재산이 들어올 때 평등이 빠져나갔다. 재산을 소유하자마자 인간들은 재산을 보존해야만 했다. 그리고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부를 가져야만 했었다. 여기까지는 홉스, 로크, 루소를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정부의 강제력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강제력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그는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급진주의자가 되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반대하는 모든 것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뿌리로부터 항상 발전을 가리키는 역사의 교리를 시작하면 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 시민사회(정부)와 함께 등장한 노동분업으로 불평등한 재산의 결과가 소위 인간의 소외였다.

이것은 경제적 조건의 결과였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삶, 사고, 존재, 그리고 도덕에 관한 것 등 실로 모든 것이 생산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민사회란 강제적 착취에 지나지 않는 계급정부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완전히 해결할 것을 고집했다. 모든 재산이 공산화되면 인간들의 불화와 소외의 모든 원인들이 당장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정부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루소가 그렇게 비판했던 경쟁심은 사라질 것이고 노동분업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조건 속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할 것이고, 따라서 노동은 사라질 것이다.

인류를 노동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약속한 마르크스 정권들은 실제로는 소련 공산정권의 역사가 보여주듯 폭정체제로 자유의 억압체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역사는 입증해주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지적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지성의 궤도 이탈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으로 포장한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의 비극처럼 공산주의는 그 자체에 죽음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좌절한 공산주의자들은 갑자기 근대성 자체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으로 번지점프를 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그 기원을 둔 근대 사상가들, 아니 이성의 산물인 지성 그 자체와 함께 동반자살을 꾀하려 든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런 논리적 모순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들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방과 창조라는 위장된 슬로건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면서 기존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를 모두 해체하기 위해 치열한 맹목적 투쟁에 몰입하고 있다. 그들에겐 투쟁만이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성과 도덕을 자살에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허무주의적 지성적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전통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한다. 그 전통은 인간적 열정에 의해 이성에 부과되는 한계를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존중하고 또 꾸준히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변함없이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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