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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석 칼럼] 英·美·佛의 ‘국회 예산권 제한’에서 배우자

[옥동석 칼럼] 英·美·佛의 ‘국회 예산권 제한’에서 배우자

기사승인 2023. 05. 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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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석 인천대학교 교수
작년 국회는 행정부의 2023년도 예산안에 대해 1,400여개에 달하는 세부사업의 예산을 수정했다. 예산안 심사뿐만 아니라 국회는 입법에서도 예산투입을 요구하는 재정소요 관련 법안들을 다수 발의하고 있다. 최근의 양곡법,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 등이 모두 다 그렇다. 21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재정관련 계류법안 497건의 총 재정부담은 418.6조원에 달하여 올해 정부 예산의 65.5%에 달한다. 국회는 국회의 예산편성권 확대를 위한 헌법 개정까지 들먹인다. 이러한 재정소요 법안의 양산 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주요 선진국들은 국회 예산권을 제한한다. 
주요 선진국들은 국회의 예산권을 제한하는 형태로 이러한 문제에 대처해왔다. 재정민주주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국에서는 이미 300여 년 전부터 "재정부담이 발생하는 어떠한 법안 또는 결의도 내각을 통한 동의가 접수될 때까지는 의회 내에서 검토 자체를 금지한다"는 의사규칙(Standing Orders)을 채택하고 있다. 의회와 행정부가 융합되어 있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서 의사규칙은 사실상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의사규칙을 통해 재정부담을 초래하는 입법이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것을 막는다. 더구나 행정부 예산안을 의회가 수정하면 내각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의회를 해산하는 관례까지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비록 1789년의 헌법에서 의회가 예산권을 보유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미국 의회는 1921년에 예산회계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에게 예산편성권을 위임하였다. 이는 19세기 말까지 의회가 직접 예산을 편성했을 때 나타난 비능률, 부패, 사기 등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결과였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의 예산제도를 조사하면서 행정부가 전적으로 예산편성권을 행사하는 영국을 특별히 주목했다. 이러한 예산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미국은 대통령제의 안정적인 예산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고 이후 전 세계의 패권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1921년 이후 유명무실했던 미국 의회의 예산권은 1974년 의회예산법이 제정되면서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의회 내에 예산총량과 분야별 배분의 조정기능을 담당하는 예산위원회를 설치했고, 재량지출과 의무지출을 구분하여 상임위원회별로 그 역할들을 구분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재정적자를 타개하고자 의회가 스스로 자신의 예산결정을 제한하는 다양한 조치들을 입법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통해 의회는 의무지출에 대해 PAYGO(Pay-As-You-Go) 원칙을, 재량지출에 대해 지출한도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 의회는 국민적 신뢰를 얻고자 자기제어 조치들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역시 예산에 대해서는 의회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1789년 대혁명 이후 170여년간 프랑스는 매우 혼란한 헌정체제를 경험했지만, 1959년의 제5공화국 헌법에서 허약한 행정부와 잦은 내각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을 비로소 극복할 수 있었다. 행정부가 입법을 주도하고 강력한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의사규칙들을 헌법에 규정했다. 특히 예산안과 재정소요 법안에 대해서는 일반 법안보다 더 확고하게 행정부 우위를 보장했다. 정부의 지출을 증가시키거나 수입을 감소시키는 개별 의원의 제안을 금지하며, 의회가 70일간의 예산심사 기한을 준수하지 못하면 행정부가 명령(ordinance)으로 예산을 확정할 수 있도록 했다.

◇ 국회 예산권의 올바른 방향
그런데 우리 국회는 이들 국가의 역사적 경험들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PAYGO, 분야별 지출한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재정적자를 제한하는 가장 기본적인 재정준칙도 우리 국회는 아직 채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 내에 어떠한 합리적인 조정절차도 없으면서 예산안 심의에서는 수많은 세부사업들의 예산을 수정하고 있다. 법률안 발의 때는 특정 사업에 재정투입을 강제하는 조항을 넣고자 갖은 노력을 다한다. 국가 전체의 이익과 장래를 위한 전략적 논의보다는 특정 집단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세부사업들의 예산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우리 국회는 "국회가 예산을 증액하고자 할 때에는 행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헌법 제57조의 제정 취지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제헌국회에서 이 조항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 제헌헌법 제안자 유진오 박사는 국회가 국민 부담을 가볍게 하는 데 치중하는 것이지 국민 부담을 증가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취지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 조항은 국회의 매년도 예산안 심사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국회의원들이 재정부담을 초래하는 법안을 행정부 동의 없이 무분별하게 제안하는 것은 우리 재정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산에 대해서는 행정부의 우위가 확고하게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예산의 총량은 제한되어 있기에 우선순위와 효과성에 따른 중앙집중식 조정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예산은 특정 계층과 집단에 차별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예산의 합리적인 조정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으로 활동하는 국회보다는 위계질서에 기초하는 행정부의 역할이 더 많이 요구된다. 국회는 전략적 관점에서 거시예산 심사에 주력하고 세부사업 예산에 대해서는 행정부의 편성권을 존중하여 사후점검과 감독에 주력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예산제도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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