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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성공적인 정치가나 성공적인 전략가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낭만적이었다. 권력이 없을 때 그는 엄청나게 무책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지면 그는 무자비하게 불한당 같았다. 평화 시절의 정치에서 처칠은 얕은 물에서 몸부림치는 좌초한 고래였다. 그러나 전시에 그는 무한한 만족을 느꼈다. 그가 1930년대에 죽었다면 그는 빛나는 실패의 명성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1930년대에 죽지 않고 살아서 겁먹고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패배 후에 국민들을 집결시키고 영국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시련을 통해 국가를 지탱했으며 강대국으로서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승리로 이끌었다. 이 승리는 그렇지 못했다. 세계는 너무나 급속히 변화하여 처칠과 그의 세대가 언제나 당연시했던 세계 속의 영국의 역할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처칠의 결함이 아니었다. 처칠이 기억되길 바라는 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일 것이다. 결국 영국의 제2차 세계대전 수행, 다양한 군부대의 상이한 견해와 이익을 조정하고 명령과 위협, 그리고 그것들을 동맹국들의 견해 및 이익과 조화시키는 책임을 진 것은 바로 처칠이었다.
그러나 처칠의 전쟁 수행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국내에서 행사한 그의 리더십이었다. 처칠이 거의 글자 그대로 승리를 위해 어떤 짐도 지고, 또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된 그리고 어떤 심각한 강요 조치도 없이 그렇게 할 국민들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어떤 전략적 기술이나 관리 능력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어떤 다른 정치가도 영국 국민들에게 그런 희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탁월한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하원에서 불만이 있었고 실패했지만 두 번의 불신임 투표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분열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반기에 보수당은 허버트 애스퀴스(Herbert Asquith) 자유당 정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며 후반기 중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수상은 애스퀴스파 자유당원들과 젊은 보수주의자들, 불만스러운 장군들과 언론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했었다.
처칠은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통해 로이드 조지가 할 수 없었던 국가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세대 전의 로이드 조지와는 달리 그는 방송과 영화의 미디어를 통해 자기의 카리스마를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치적 연립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보수당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변절과 오판의 소름 끼치는 기록을 가진 정치적 독불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해 그들의 계급 파괴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로이드 조지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처칠을 자기 계급의 적으로 보지 않았다. 보수당으로부터 그의 거리감과 도시의 은행가들과 중부의 제조업자들의 방탕과 무관했던 것이 노동당 지도자들에게 처칠은 보다 수용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당 지도자들이 어느 정도 합의하고 또 노동당이 어느 정도 주도되게 하는 노동당의 역사에서 아주 드문 경우들 가운데 하나였다.
분명히 어떤 다른 보수당의 수상도 처칠이 했던 것처럼 노동당 동료들에게 국내적 행정의 그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처칠은 노동당 지도자들이 보수당원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시의 노동계급의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능한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이 입각하여 노동문제를 다루었다. 탁월한 기업가인 울턴 경(Lord Woolton)이 식량분배를 다루었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브렌던 브라켄(Brendan Bracken) 정보장관이 과소평가 되었지만, 중대한 일에 처칠에게 열정과 상상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영국인들은 위험과 불편을 견디면서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과거 방식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려는 압도적인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시 동지애에 대해 너무 황금빛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전쟁의 중간 시기에 노동분쟁, 파업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긴장과 불만들이 있었다. 성공적인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전적으로 처칠과 그의 동료들의 덕택은 아니었다. 소련에 대한 히틀러의 공격이 좌익분자들을 침묵시켰다. 그들은 수도 굉장히 많았으며 혁명적 목적을 위해 사회의 곤란과 긴장을 이용했기에 더욱 위험스러웠다. 그러나 히틀러에 의한 소련의 침공은 그들을 침묵시켰을 뿐만 아니라 비록 엄격히 일시적이지만 자본주의 적과 그들이 훨씬 더 싫어했던 온건한 노동당 지도자들과 기꺼이 동맹을 맺게 해주었다. 환경이 오직 소수의 파시스트 사이코패스들만을 제외한 진정한 국가적 통합을 창조했다. 그 결과 과거 상당 수의 공산주의자들도 그들의 옛 충성을 신속하게 벗어던지고 민주적 과정에 항구적으로 흡수되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과거의 충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처칠은 난데없이 국가적 통합을 마술처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민통합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환기시켜, 또 흐름을 발견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그의 리더십하에 전쟁과 복지가 손을 잡고 함께 갔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들의 전임자들이 향유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권력의 몫을 포섭했으며 그것은 낡은 질서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결의에 차 있었다. 그리하여 처칠은 쟁쟁이나 복지를 통해 전후 노동당의 복지정책의 구현에 아주 믿을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처칠이 국민적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용기와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유머가 필요했다. 요컨대, 당시 국가통합의 비결은 정당, 종교와 계급의 모든 장벽들을 초월하는 통일된 국가에 대한 처칠의 굳건한 비전이었다. 국내외로부터 위협하는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렇게 일반적으로 국가적 지도자로 수용하게 만든 것은 역사가로서 어떻게 국민통합이 창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 뿌리를 둔 비전과 동시에 정치가로서 그의 자신감이었다. 영국이 직면한 역사상 최대 그리고 최고의 위험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런 초월적인 국가적 통합에 대한 처칠의 올바른 비전과 그의 국민통합의 탁월한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영국인들은 어쩌면, 아니, 거의 틀림없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확실하게 소멸되었을 것이다. 처칠은 단순히 탁월한 전사의 지위를 넘어 국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
1940년 5월 10일 그가 수상으로 취임하는 날 프랑스가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5월 29일 덩케르크의 성공적 철수작전 후에 그가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불어나는 자신감과 점증하는 힘으로 하늘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착륙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순간에도 믿지 않지만 이 섬이 큰 부분이 굴복하고 굶주린다 할지라도, 그때 가서는 바다 건너 우리의 제국이 영국의 함대에 의해서 무장되고 지도되어 신세계(the New World)가 모든 권력과 힘을 가지고 늦지 않게 구세계(the Old World)를 구원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나설 때까지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처칠의 이 연설은 영국의회를 감동시켰으며 여러 명의 노동당의원들이 울었다. 1940년 영국공군의 비행 중대장이었으며 후에 처칠의 경호원이 된 론 골딩(Ron Golding)은 이 처칠의 연설을 듣고 나서 영국인들은 독일인들이 쳐들어오기를 오히려 원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견뎌 나가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감동적으로 영국인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불안해하던 영국인들은 처칠 수상의 이 연설로 인해 마침내 전쟁을 치를 심리적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의 소식을 듣자마자 처칠은 "마침내 우리가 이겼다"고 소리쳤다. 그가 그토록 기대하던 미국의 참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의 승리는 보장되었다고 확신했다. 당시엔 처칠 수상 외에 누구도 그런 예지력을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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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