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 “아버지는 당구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평생 노력한 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share.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112010006020

글자크기

닫기

장원재 스포츠전문기자

승인 : 2024. 11. 12. 16:03

LPBA 올리비아 리
'한국 당구의 전설' 이상천의 외동딸
KakaoTalk_20241112_152539377
이상천의 외동딸 프로당구선수 올리비아 리(32)/ 사진제공=전형찬
이상천(1954~2004)을 아시는가. 한국 당구의 전설이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에 입학한 천재 소년은 당구에 평생을 걸었다. 학교도 중퇴했다. 당구가 아직은 칙칙한 이미지의 잡기였던 시절이다. 그는 한국 당구의 스포츠화를 꿈꿨고 더 큰 무대를 향해 도미했으며 마침내 세계 챔피언이 되어 한국 당구의 이미지를 단숨에 양지로 끌어 올렸다. 그의 무남독녀 올리비아 리(32)를 만났다.

-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상천의 딸이고 한국 이름은 이혜진이다. 뉴욕 태생으로 약학을 공부했고, 2022년 LPBA(여자프로당구) 선수로 데뷔했다."

- 이상천은 어떤 사람인가.

"평생 당구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한 분이다. 당구의 스포츠화, 나아가 당구의 메이저 스포츠화가 필생의 꿈이셨다. 2003년 귀국 후에는 '꿈을 꾸는 자는 아름답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로서 당구를 만들자'고 하셨다."

- 이상천이 당구를 시작한 계기는.

"고3 겨울방학 때 처음 접하고 바로 당구의 매력에 푹 빠지셨다고 들었다. 3개월만에 300점을 치셨다고 한다. 대학 다닐 때도 캠퍼스보다는 늘 당구장에서 사셨다고 한다. 아쉽게도, '당구선수'라는 직업이 없던 시절이다."
- 1987년 도미했다.

"꿈을 좇아 미국으로 간 것이다. 33살 때다."

-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아버지는 대학(서울대 응용수학과)도 중퇴하고 당구에 올인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아버지의 결정을 지지했다. 재정적인 지원은 없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생계 해결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힘껏 사셨다. 영어도 능숙하지 못해 어려움이 더했다."

- 미국에선 언제 당구 선수로 이름이 알려졌나.

"한국 당구의 존재감이 없을 때라서 처음엔 아버지도 존재감이 없었다. 재미교포인 어머니와 결혼하고 영주권 받고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대회에 나갔다. 그해 전미 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이름이 알려졌다. 2001년까지 이 대회에서 12년 연속 우승했다. 2002년 제자 페드로 피에트리부에나에게 지면서 13연패 달성에 실패했다."

- 그 사이에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1991년 베를린, 1992년 브뤼셀, 이스탄불, 1993년 암스테르담, 1994년 1월 겐트 월드컵에서 우승했고 1993/94 시즌 세계 랭킹 종합 1위에 올랐다. 겐트 대회 때 벨기에 국왕이 기립박수를 쳤고, 미국 대표 선수로는 40년 만의 쾌거여서 뉴욕 타임스(1994년 1월 19일자)에도 두개 면에 걸쳐 기사가 실렸다."

KakaoTalk_20241112_152050690
한국 당구의 전설 이상천./ 사진제공= 올리비아 리
KakaoTalk_20241112_152047814
세계 챔피언 이상천. 1993. 빌리어드 사진자료/ 사진제공=올리비아 리
- 이상천은 창의적인 선수였다.

"볼 퍼스트냐, 레일 퍼스티냐를 따지지 않고 공식에 없는 득점을 많이 하셨다. 비디오 자료를 보면 어려운 공을 참 쉽게 치신다. 자세도 반쯤 일어서서 손목 스냅을 이용했다. '독학으로 배운 당구다, 나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폼을 찾은 거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 딸에게 조언한 점이 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12살이었다. 너무 어렸고, 커서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와 '당구 놀이'는 많이 했다. 당구를 즐기라고 하셨다."

- 아버지와는 달리 오른손잡이다.

"아버지는 왼손잡이지만 양손을 모두 썼다. 양손이 모두 능숙해야 등 뒤로 치는 상황에서도 사각을 없앨 수 있다고 하셨다."

- 본인의 프로 성적은.

"동호회 대회만 나가다 2018년 당구 선수인 남편과 결혼했고 지금은 프로 생활 3년 차다. 아직까지는 LPBA 대회 64강 성적이 최고다. 더 노력해서 높은 자리까지 가보려 한다."

- 이상천이 가장 강조한 것은.

"신사가 되라. 스포츠 정신에 충실하라. 일상생활은 몰라도, 대회 중에는 음주 흡연 모두 끊고 경기에 전념하셨다."

- 술, 담배는 끊으셨나.

"아주 끊은 건 50세 때다. 그런데 금주, 금연하시고 1년 만에 위암으로 타게하셨다."

-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드리고 싶은 말은.

"20년이 흘렀다. 지금 당구가 한국에서 또 세계적으로 얼마나 번성했는지 보여드리고 싶다. 아빠, 드디어 당구만 쳐서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이 왔어요!"

▲ 이상천(영어이름 Sang Lee)은
경기고(58회)를 졸업하고 서울대 응용수학과를 중퇴했다. 전국당구대회 5회 우승(1978·1979·1981·1982·1984·1985)하며 국내 무대를 평정한 뒤 1987년 도미, 1990년부터 12년 연속 미국 선수권대회를 제패했다. 1991년 5월 독일 베를린 월드컵 대회에서 첫 우승한 뒤 1992년(브뤼셀, 이스탄불), 1993년(암스테르담), 1994년(겐트), 1999년(라스베가스) 월드컵을 차지했다. 1993년 세계랭킹 종합 1위, 1999년 세게랭킹 2위에 올랐다. 2004년 5월 대한당구연맹 회장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위암으로 타계했다. 2007년 미국당구협회(BC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뉴욕에서 매년 그를 추모하는 상리 인터내셔널 오픈대회가 열린다. 외동딸 올리비아 리(32)도 아버지를 따라 프로 당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KakaoTalk_20241112_152553239
올리비아 리(왼쪽)과 장원재 전문기자.사진=전형찬
장원재 스포츠전문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