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은 달력상 가을로 치는 9월까지 약 보름밖에 남지 않은 때다. 따라서 이 시점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이행기 또는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교절기라 할 수 있다. 여름이면서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는 시점인 셈이다. 아직은 늦더위가 만만찮은 여름이지만 가을의 징조가 나타나는 때인 것이다. 다가오는 계절의 징조 또는 전조(前兆)를 우리는 흔히 계절의 전령사(傳令使)라고 부른다. 이제 가을의 전령사들을 감지하며 늦더위를 달래보자.
사실, 입추 무렵부터 조석의 서늘한 바람이나 한낮의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도 촉각으로 느끼는 가을의 전령사라 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는 흔히 우리의 촉각에 가장 먼저 포착된다. 그래서 겨울에서 봄에로의 이행기에는 갑작스러운 훈풍으로 봄을 예견하듯, 여름에서 가을에로의 이행기에는 느닷없는 서늘한 바람으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계절의 전령사는 촉각보다는 청각이나 시각에 포착되는 것들이 더 많다.
이즈음 청각에 포착되는 가장 뚜렷한 가을의 전령사는 풀벌레들이다. 그 가운데 귀뚜라미는 대체로 8월부터 나타나는데 그 소리는 흔히 섬돌 밑이나 담벼락 사이에서 들려온다. 본래 귀뚜라미 소리는 매우 가냘프고 처량한데 가을이 가까워 공기가 건조해질수록 더욱더 처량하게 들린다. 나희덕 시인은 귀뚜라미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라고 회의하지만, 그것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가을을 예견하게 하는 소리도 없을 것이다.
시각에 포착된 가을의 전령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빨갛게 익은 고추라고 할 수 있다. 고추는 늦여름부터 익는데 익을수록 새빨갛게 된다. 시골에서는 흔히 태양초를 만들기 위해 빨갛게 익은 고추들을 길가나 마당의 멍석 위에 널어 말리는데 이것이 눈에 잘 띄어 사람들에게 가을의 전령사로 확실하게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녹색이 지배적인 시절에 무더기로 널린 고추들의 새빨간 색은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가을의 내도를 느끼게 한다.
가을의 전령사로 잠자리도 빼놓을 수 없다. 늦여름에, 좀잠자리는 떼로 공중을 나는 모습으로, 고추잠자리는 그 붉은색으로, 시절을 알린다. 고추잠자리의 수컷은 미성숙할 때는 주황색을 띠다가 성숙해지면 날개를 제외하고 몸 전체가 빨갛게 혼인색을 띤다. 그런 수컷이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며 마른 풀 줄기나 땅에 꽂힌 막대기 끝에 앉아 있으면 비록 한 마리지만 그 붉은색 때문에 사람들 눈에 잘 띈다. 붉은 고추잠자리는 외로운 가을의 전령사다.
배롱나무, 무궁화, 능소화는 한여름부터 조금씩 꽃이 피다가 늦여름에 무더기로 피어나기에 그 모습은 가을의 전조가 된다. 이들 꽃들은 한 송이가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송이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특히 배롱나무는 주름진 많은 꽃들이 가지들의 끝에 원추꽃차례로 모여 피는데 무더기로 피면 꽃들이 나무를 뒤덮은 듯이 보인다. 배롱나무는 정원수로 많이 심기에 홍자색 꽃이 가득 핀 배롱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을의 전령사다.
이 무렵에 옥수수가 수확된다. 그래서 그 원산지인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8월 말이나 9월 초에 드는 보름달을 ‘옥수수 달(corn moo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국에서 옥수수는 흔히 간식으로 쪄 먹거나 구워 먹는데 달큼하고 쫀득하여 많은 이들이 애호한다. 이런 햇옥수수를 즐길 수 있는 때는 확실히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때다. 이들 전령사들의 존재로 이제 무더운 여름도 끝나가고 시원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을아, 어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