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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덕수와 최규하, 12·3과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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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2. 23. 09:22

이정훈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정훈TV 대표
이정훈 선배
이정훈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정훈TV 대표
플라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당신보다 못한 이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독일의 법학자 폰 예링은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이를 보호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도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물고기가 물을 모르고 살 듯, 우리도 문화에 젖어 산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12·3을 12·12와 같은 내란으로 보려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영화 '서울의 봄' 영향인 듯하다. 이 영화엔 허구가 가미됐다는 문구가 있지만 무엇이 허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적 의도가 들어갔다면 그 의도에 젖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12월 17일 한 시상식에서 "12월 3일에 정신 나간 대통령이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친위 쿠데타를 벌이고…"라고 했다.

12·12는 10·26에서 비롯됐다. 그날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한 김재규는 형님으로 불러온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박정희 시신 수습을 맡기고 옆 건물에 불러 놓은 정승화 육군 총장을 만나 같이 육군본부로 갔다.

박 대통령 시신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긴 김계원은 최규하 총리를 불러 박 대통령 피살 경위를 설명했다. 이어 비상국무회의 연락이 오자 함께 육본으로 갔다. 김재규는 자신이 했다는 것을 빼고 '대통령 유고'만 밝혔기에, 이 회의에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김계원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란 귀띔을 했기에 헌병대와 보안대가 김재규를 체포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했을 때 대기하던 중정 요원들은 집중사격으로 경호실 요원들을 사살했다. 이 요란한 총성을 바로 옆 건물에 와 있던 정승화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는 신발을 신지 않고 피가 튄 와이셔츠 차림에 권총을 들고 정승화에게 달려와 육본으로 가자고 했었다. 그렇다면 정승화는 누가 박 대통령을 죽였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침묵했다. 김계원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최규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때문에 합수본부로 모여든 헌병, 군검찰관, 일반 검사 등 다른 기관 출신도 이들이 김재규에 동조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계엄사령관과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더 큰 직책을 맡게 됐으니 직접적인 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신고한 김계원만 피조사자로 전락한 것은 모순이었다.

그러할 때인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에서 최규하가 당선돼 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으니 긴장감은 높아졌다. 정승화를 긴급체포해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한 합수본부는 12일 저녁 수사대를 육군 총장 공관으로 보내고,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최 대통령을 찾아가 결재를 받기로 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지금 중요한 수사는 권력자의 개입을 막기 위해 자기 기관장에게도 보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했는데, 최 대통령은 먼저 국방장관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는 사이 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양측은 부대를 동원했다.

이 대립에서 승리한 것은 합수본부였는데, 이는 정 총장을 의심한 군 지휘관들이 많았던 탓이다. 여러 사건을 거쳐 전두환 본부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아 결재를 받고 같이 최 대통령을 찾아가 결재를 받았는데, 그때는 모든 사태가 끝난 13일 오전 5시쯤이었다.

이러한 12·12를 내란으로 몰려고 했던 것은 '정치 위기'에 처했던 김영삼 정권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공소시효 15년이 지났다'는 것을 근거로 빠져나가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더 큰 위기에 처하게 된 김영삼 정부는 국회를 통해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만들고 다시 기소하게 했다.

그러나 총장 공관 총격전에서 합수본부가 먼저 쐈거나 신군부가 앞서 부대를 동원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뭘로 내란으로 규정할 것인가가 문제가 됐는데, 법원은 사후결재에 주목했다.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결재가 있기 전에 신군부가 정 총장을 체포하고 부대를 동원한 것은 불법이라고 본 것이다.

12·3에는 사후결재가 없었다. 최규하는 10·26의 진실을 알고도 침묵했지만, 한덕수 총리는 반대했고 이 계엄을 심의한 국무회의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국회에서 분명히 밝혔다. 12·3에는 대립하는 부대의 출동은 물론이고 총격도 없었는데, 왜 내란으로 모는 것일까. 특례법이 없었으면 12·12도 기소할 수 없었는데.

12·3은 내란이라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고 초대형 시위를 기획하는 세력은 누구일까. 적잖은 국민이 '정치 무관심'을 방패 삼아 숨어 있는 사이, 수상한 세력이 대한민국을 이상한 대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내 주권은 내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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