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이효성 칼럼] 유언비어의 정치사

[이효성 칼럼] 유언비어의 정치사

기사승인 2023. 09. 24. 17:5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이효성
아시아투데이 주필
유언비어(流言蜚語)는 전체로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유언비어는 본래 유언과 비어의 합성어다. 유언(流言)은 '근거 없이 떠도는 말'로, 비어(蜚語)는 '이리저리 퍼뜨려 세상을 현혹하게 만들거나 근거 없이 떠도는 말'로 정의된다. 유언은 그냥 널리 퍼진 말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비어는 일부러 만들어 퍼뜨렸다는 점이 강조되는 말이다. 따라서 유언비어는 단순히 널리 퍼진 말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말도 포괄한다.

인간의 언어적 산물은 대체로 정치적 성향을 띤다. 주관적인 주장이나 의견은 말할 것도 없고 흔히 객관적인 사실로 말해지는 뉴스도 마찬가지다. 유언비어는 그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훨씬 더 강한 언어적 산물이다. 그래서 유언비어는 여론의 지표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권력자들은 유언비어로 민심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데 연연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널리 퍼뜨리기도 한다.

예컨대 진시황은 유학자들이 자신에게 비판적인 말들을 하자 공론(空論)을 일삼는다며 그들의 책을 불태우고 그들을 산 채로 매장했다. 세계 최초의 신문 현상으로 간주되는 로마 원로원의 공시물인 '악타 세나투스'에는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조작된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 때 "황제가 그 화염을 보며 시를 읊었다"는 불리한 소문이 퍼지자 이에 대응하여 "기독교도들이 방화했다"는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으로 위기에 몰린 훈구파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이 새겨진 나뭇잎으로 조광조를 모함했다.

근대의 그런 극악한 예로 1923년의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내무성의 조처를 들 수 있다.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악의적인 지침서를 경찰에 하달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불순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혹을 심었다. 그에 따라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하여 몽둥이, 죽창,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하고 거리에서 행인들을 불시에 검문하여 조선인으로 의심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여 5000~6000명이 희생되었다.

유언비어의 탄압과 악용은 현대사회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의 활용으로 뉴스가 더 빨리 더 널리 퍼지기에 유언비어의 탄압과 악용의 정도도 더 우심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자 표본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나 대통령 시절에나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낙인찍으면서, 스스로 많은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그래서 언론들은 그가 말할 때마다 그 발언 내용의 사실 여부를 체크하고 언론사에 따라서 몇 번째 거짓말이라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민주국가에서는 유언비어 또는 가짜 뉴스를 탄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권력자들은 자기들에 불리한 내용은 유언비어나 가짜 뉴스로 탄압하고 처벌한다.

한국 정치에서도 유언비어는 시비의 대상이 되어왔다. 군사정변이 일어나면 그 포고령에 반드시 유언비어의 날조·유포를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군사정권에서뿐만 아니라 문민정부에서도 권력자와 권부는 유언비어 대책을 발표하고 그를 빌미로 고소·고발이 이루어지곤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은 다 유언비어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불리한 정보를 유언비어로 낙인찍어 단속하고 탄압하는 것은 효과 있는 대책도 올바른 처방도 아니다. 유언비어든 가짜 뉴스든 장내의 유해균과 같은 것이다. 올바른 섭생으로 유익균을 늘리듯, 좋은 정치로 민심을 얻는 것이 최선이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