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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2> 망국의 서사시 ‘꿈꾸는 백마강’

[대중가요의 아리랑] <12> 망국의 서사시 ‘꿈꾸는 백마강’

기사승인 2022. 10. 1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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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려' '꿈꾸는 백마강'은 백제의 흥망을 서사적으로 그린 곡이다. 백제 멸망의 상징적인 공간과 애틋한 전설을 원용해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을 절절하게 대변했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춘망(春望)'이란 시에서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이라 탄식했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나'라는 뜻이다. 우리 역사 삼국시대에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백제의 멸망도 그렇다. 최후의 공간이었던 부여 낙화암 산기슭에도 해마다 봄이 오고, 쓰라린 낙화의 아픔을 지닌 백마강 물결도 여전하다.

불국정토를 꿈꿨던 백제의 흥망을 묘사한 '꿈꾸는 백마강' 노랫말은 당연히 불교적이다. 낙화암과 고란사는 패망으로 버려진 공간이자 잃어버린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여기에 백마강 달밤을 등장시켜 나라의 운명과 삶의 무상함을 배가시킨다. 작사가 조명암(본명 조영출)도 불교와의 연분이 참 두터운 사람이었다. '꿈꾸는 백마강'이란 가요시가 나온 것 또한 시절인연이었던가.

조명암은 아버지가 동학 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붙잡히자 어머니가 가족을 데리고 금강산 건봉사로 들어가 공양주 보살로 살게 되었다. 조명암 또한 삭발하고 법명까지 받았는데 당시 건봉사에 머물던 한용운 스님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도와준 덕분에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시창작과 더불어 주옥같은 가요시를 많이 남겼다.

'꿈꾸는 백마강'은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신인 가수 이인권(본명 임영일)을 스타로 만들어 준 노래이다. OK레코드사 이철 사장과 작곡가 박시춘의 오디션을 통해 남인수의 대역으로 노래하며 가수의 길로 들어선 그는 '꿈꾸는 백마강'(1940년) 덕분에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지만, 노래는 굴곡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의 발매금지는 그렇다 쳐도, 광복 후에도 금지곡이 된 것이었다. 조명암의 월북 때문이었다.

이인권의 삶에도 낙화암 같은 서러운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었다. 6.25 전쟁이 초래한 아픔이었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귀국선'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중 전쟁이 터지자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군예대 위문공연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공연장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가수이던 아내가 현장에서 숨지고 자신은 다리 부상을 입는 참변을 당했다. 당시의 심경을 담은 탱고풍의 자작곡이 '미사의 노래'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노래에도 종소리가 등장한다.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는 작곡가로 활동했다. 독학으로 익힌 기타와 색소폰 그리고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숱한 명곡을 남겼고 상당수의 영화주제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인권은 1970년대 초 54세의 일기로 백마강의 낙화처럼 스러져갔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 참담한 삶을 마감한 나이도 쉰넷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슬픈 이름이다. 1360여 년 전의 일인데, 백제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시려온다. 부여는 아픈 땅이다. 멸망한 왕국의 종착역이었기 때문일까. 능소화처럼 처연한 궁녀들의 낙화(落花)지점. 낙화암은 그 슬픔과 아픔의 정점이다. 궁녀들의 넋을 기린 고란사의 이름도 가슴 먹먹하다. 달빛 어린 백마강에 망국의 시린 감회가 강물처럼 흐르는 통한과 탄식의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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