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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3> 유랑자의 정한(情恨) ‘나그네 설움’

[대중가요의 아리랑] <13> 유랑자의 정한(情恨) ‘나그네 설움’

기사승인 2022. 10. 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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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돈지 십년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장조 트로트의 대표작인 '나그네 설움'은 지향 없이 표류하는 식민지 말기 조선인들의 고독과 정한을 구구절절하게 풀어냈다.

유랑가의 백미인 백년설의 가요 '나그네 설움'은 해방 후 발표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나그네'와 그 정서가 일맥상통한다. 조지훈 시인의 '완화삼'에 대한 화답시로 유명한 '나그네' 역시 유랑자의 방랑의식을 노래하고 있다. 다만 광복 후에 나온 작품으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벗어난 행운유수의 행보를 보인 것이 다르다. 하지만 노랫말이나 시편을 관류하는 주제어는 모두 '나그네'인 것이다.

농경민족의 정체성을 감안할 때 일제의 폭정으로 고향과 조국을 잃고 떠돌아야 했던 '나그네'의 의미는 낭만의 유전(流轉)이 아닌 비극의 유랑(流浪)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국주의로 치닫는 전시 총동원령 아래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식민지 대중의 절망은 앞서 '목포의 눈물'이 토로한 망국의 서러움 그 이상이었다. '나그네 설움'은 그 고달프고 한 맺힌 겨레의 정서를 애잔하게 그려낸 것이다.

작사가는 조경환(예명 고려성)으로 작곡가 나화랑의 맏형이다. 경북 김천의 명문가 후손인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그네 설움' 노랫말이 탄생한 배경도 그랬다. 백년설과 더불어 밤새 일본 경찰의 취조에 시달리다 풀려난 어느날 새벽녘이었다. 광화문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울분과 시름을 달래는데 문득 내 나라 내 국토에 있으면서도 나그네가 되어버린 설움이 울컥 치솟았다.

그렇게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회한의 문구들을 담뱃갑의 여백에 적은 것이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당초 1절이었던 이 가사는 일제의 검열로 바뀌었다. 가사에 선율을 얹은 작곡가는 이재호였다. 그는 백년설의 또 다른 히트곡인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등의 명곡들을 남긴 작곡의 귀재였다.

유려한 이재호의 멜로디가 순후한 백년설의 보컬과 운명적 조화를 이룬 것이다. 유장한 대금의 가락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백년설의 목소리는 식민지 대중의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백년설(본명 이갑룡)은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사한 친형 이혁룡을 자랑스럽게 여긴 문학청년이었다. 가수가 되면서 예명도 민족의 정기를 품은 백두산 흰눈을 상징하는 백년설(白年雪)로 지었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최후의 발악을 감행하던 광기의 시대는 인기 가수의 삶에도 치욕을 강요했다. 백년설은 군국가요를 부르며 친일부역자란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일제의 총칼 앞에 선 무력한 식민지 예인들에게 한때의 행적을 두고 가수로서의 삶 모두를 단죄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암울한 시절의 가요인으로 대중을 위무했던 공적을 좀 더 높게 평가하는 아량을 가질 수는 없을까.

해방 후 백년설의 가수 활동은 시들해졌다. 1963년 은퇴를 선언한 후 고단한 말년을 보내다가 머나먼 타국에서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2000년대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추진되던 '백년설 가요제'도 친일 반민족 시비로 좌절되었다.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을 부르며 식민지 민중의 아픔을 위로했지만, 영욕이 교차한 스스로의 삶 또한 광복 후에도 영원한 나그네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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