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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4> 불멸의 사모곡 ‘불효자는 웁니다’

[대중가요의 아리랑] <14> 불멸의 사모곡 ‘불효자는 웁니다’

기사승인 2022. 10. 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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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가수 진방남이 울먹이며 부른 이 노래는 세월의 강을 넘어 뭇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불멸의 사모곡이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가수 진방남이 어머니를 그리는 애달픈 호곡성이다. 광복 이전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가슴을 뒤흔든 최고의 절창이었다. 진방남의 데뷔곡인 '불효자는 웁니다'는 탄생 과정에서부터 눈물겨운 사연이 어려 있다. 1940년대 식민지 조선 땅에는 녹음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태평레코드사 전속이었던 진방남은 음반 취입을 위해 신카나리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날 '모친 별세'라는 전보가 날아든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잠긴 진방남은 스튜디오 밖으로 뛰어나와 꺼이꺼이 울었다. 목이 잠기는 바람에 어렵게 잡은 취입 일정을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진방남은 눈물과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겨우 녹음을 마쳤다. 그래서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는 차라리 통곡에 가깝다.

노래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던 날 마산역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시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그 애틋한 자태가 뇌리를 떠나지 않아 가슴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인지 노래는 크게 히트를 했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원한 사모곡으로 남았다. 진방남은 그후 '늘 모자라고 못나서 채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 '반야월(半夜月)'이란 예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경남 마산 출생인 진방남(본명 박창오)은 1939년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가 주관한 전국가요음악콩쿠르에서 1등으로 뽑히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0년 '불효자는 웁니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그는 노래할 때는 진방남, 노랫말을 지을 때는 '반야월'이라는 예명을 가장 많이 썼다. 진방남은 전천후 예술인이었다. 방송국, 레코드사, 신문, 잡지 등에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예명을 달리했다.

추미림, 박남포, 고향초, 남궁려, 금동선, 옥단춘, 백구몽 등이 모두 다른 예명이다. 반야월은 우리 가요사상 가장 많은 곡을 쓴 작사가로 유명하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울고넘는 박달재' '무너진 사랑탑' '산장의 여인' '소양강 처녀' '아빠의 청춘' 등이 그의 작품이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우리 겨레의 불효와 망향의 통곡이다. 재일동포 고국 방문 공연장에서 영화배우 김희갑이 불러 눈물바다를 이룬 일화도 전한다.

우리는 삶이 고달플수록 '어머니'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대중가요도 그렇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어머니와 관련된 노래는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어머니만큼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시대를 초월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까닭이다. 물론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이 각박해진 현대에 이를수록 더욱 그렇다.

이제는 어머니가 불효자를 만들기도 한다. 어머니의 잘못된 처신이 자식 남매간을 갈라놓기도 하는 세태이다. 하지만 인륜이 죄다 무너지지 않는 한, 가족의 개념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이없는 사랑을 지닌 어머니의 상징성은 계속 소환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불효자가 되어 또 울 것이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또한 시대를 초월해 생성될 것이다. 세상에 불효자 아닌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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